출처: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 게시일: 2026-07-18
분류: 정권·선거 변동 | 키워드: democracy, indonesia
📄 영문 전문 보기 (iocss.org) | 원문 출처 바로가기
배링턴 무어의 고전적 비교정치학 틀을 인도네시아에 적용한 이 연구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둘러싼 구조적 조건에 대한 논의를 21세기 동남아시아 정치 현실 속에서 재활성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 무어의 1966년 저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부르주아지, 지주계급, 농민계급 사이의 역학 관계가 근대 정치체제의 형태를 규정한다는 구조주의적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의 핵심 테제인 "부르주아지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 파시즘적 경로, 공산주의적 경로라는 세 가지 역사적 분기를 통해 설명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이 세 경로 어디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이 연구는 무어의 이론이 포스트식민지 국가에서 어떻게 수정되고 도전받는지를 탐색하는 학문적으로 풍요로운 사례가 된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사는 무어적 분석 틀을 시험하기에 극히 적합한 역사적 조건을 제공한다. 네덜란드 식민지배는 토지 기반 지주계급과 독립적 상업 부르주아지 모두를 기형적으로 발전시켰으며, 1945년 독립 이후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형태로 이 구조적 취약성을 반영하였다. 1965년 쿠데타 이후 수하르토의 신질서(Orde Baru) 체제는 군부(ABRI)를 독자적 정치계급으로 제도화하고, 국가 주도 경제개발을 통해 관료적 권위주의의 고전적 사례를 구현하였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레포르마시(Reformasi)를 통한 민주적 이행은, 무어가 주목한 독립적 부르주아지보다는 오히려 이슬람 시민사회 단체(NU, 무함마디야)와 학생운동, 그리고 군부 내 분열이라는 복합적 행위자들의 연합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점에서 무어의 이론에 대한 중요한 수정을 요구한다.
이 연구의 핵심적 함의는 ODA 및 시민사회 맥락에서도 광범위한 반향을 가진다. 1990년대 이후 국제 개발 담론은 민주화와 굿거버넌스를 개발 원조의 조건으로 연계시키는 '민주화 지원(democracy promotion)' 패러다임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무어의 구조주의적 시각은 이러한 제도주의적·규범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도네시아의 사례는, 외부로부터 이식된 민주주의 제도가 토착적 계급 구조와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무시할 때 어떻게 올리가르키화되거나 역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레포르마시 이후 지방 분권화 과정에서 지역 유지(bupati, walikota)와 올리가르크 자본의 결합이 나타난 것은, 민주적 형식 아래 권위주의적 실질이 온존하는 '선택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ODA 공여국과 국제기구들은 선거 제도 강화나 반부패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연구는 계급 구조적 조건의 변화 없이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이 제한된다는 구조주의적 경고를 환기시킨다.
정책적 함의의 측면에서 이 연구는 여러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정부 출범 이후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질적 변화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가 고조되는 시점에, 무어의 분석 틀을 통한 구조적 진단은 단순한 역사적 회고에 그치지 않는다. 군 출신 대통령의 집권, 미디어 자유의 위축, 시민사회 공간의 축소 등 현상들은 무어가 지적한 '구 지배계급의 재건' 시나리오와 공명한다. 이는 동남아시아 지역 개발 협력 정책, 특히 한국 ODA의 우선 파트너인 인도네시아에 대한 거버넌스 지원 설계에 직접적인 함의를 가진다. 한국의 대인도네시아 개발협력은 인프라·보건·교육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나, 장기적 개발 효과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적 구조 조건에 대한 분석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래의 연구자와 개발협력 실무자들에게 이 연구는 방법론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무어적 비교역사분석(comparative historical analysis)은 인과적 메커니즘보다 구조적 조건에 집중하기 때문에, 행위자 중심의 민주화 이론이나 제도주의적 접근과 생산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슬람 시민사회의 역할, 디지털 미디어와 정치 동원의 관계, 청년 세대의 계급적 위치 변화 등은 무어가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변수들로서, 향후 연구의 풍부한 아젠다를 형성한다. IOCSS와 같은 연구기관은 인도네시아 사례를 필리핀,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 연구로 확장하고, 무어적 분석 틀의 갱신 가능성을 탐색하는 학제 간 연구를 주도함으로써 학술적·정책적 기여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