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 게시일: 2026-07-27
분류: 정권·선거 변동 | 키워드: democracy,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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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의 고전적 저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1966)은 비교정치학의 초석으로서, 근대 정치체제의 형성을 농업 계급구조와 부르주아지의 역할이라는 구조적 변수로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다. 무어는 영국·프랑스·미국의 부르주아 혁명, 독일·일본의 위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중국·러시아의 농민혁명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설명하였다. 그의 명제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이후 비교정치 연구의 핵심 논제로 자리 잡았으며, 동남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의 정치체제 분석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인도네시아는 이러한 이론적 탐구의 가장 복잡하고 도전적인 사례 중 하나로, 수카르노의 지도 민주주의, 수하르토의 신질서 권위주의, 그리고 1998년 레포르마시(Reformasi) 이후의 민주화라는 상이한 정치체제를 연속적으로 경험한 나라이다. 본 논문이 무어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정치체제 변동 경로를 재해석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고전 이론의 적용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검토함으로써 비교 정치경제학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학술적 시도로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무어의 분석 틀을 인도네시아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하는 이론적 도전은, 인도네시아의 계급 구조가 무어가 상정한 유럽·동아시아적 맥락과 현저하게 상이하다는 점이다. 자바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의 농업 구조는 대토지 소유 귀족 계층이 부재하거나 미발달하였고, 식민지 시기 네덜란드의 플랜테이션 경제는 독자적인 토착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체계적으로 억제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은 무어의 세 가지 경로 어디에도 완결하게 부합하지 않는 '회색 지대'를 형성하였다. 1965년 9·30 사건과 그 이후 전개된 대규모 반공 학살은 세계 최대 비집권 공산당 중 하나였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소멸시켰고, 이는 농민 계급의 조직적 역량을 궤멸시킴과 동시에 군부 주도 권위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정치적 공간을 창출하였다. 논문은 이 과정이 단순히 무어적 '파시즘 경로'의 반복이 아니라, 군부(ABRI), 이슬람 세력(NU·무함마디야), 그리고 화교 자본이라는 비서구적 행위자들 간의 복잡한 연합 구조 속에서 전개된 독자적 권위주의화 과정임을 실증적으로 논증한다.
수하르토 신질서(1966-1998)의 개발권위주의적 성격과 이후 민주화 이행을 설명하는 데 있어, 논문은 무어 이론의 수정 및 확장 가능성을 탐색한다. 신질서 체제는 국가 주도 자본 축적과 군부의 이중 기능(dwifungsi)을 결합한 독특한 정치경제 모델을 구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코포라티즘적 통제 하에 포섭되었다. 그러나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외생적 충격은 이 체제의 경제적 정당성을 붕괴시켰고, 대학생 운동과 중산층 시민사회 세력의 연합이 레포르마시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무어가 강조한 '상업화된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 동력'이라는 명제와 부분적으로 공명하되, 그 사회적 기반은 제조업 자본가가 아닌 도시 중산층 전문직과 이슬람 민주주의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이론적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논문은 이 점에서 루에쉐마이어(Rueschemeyer)·스테판스(Stephens)의 계급연합론과 오도넬(O'Donnell)의 이행학 논의를 무어 이론의 보완 자원으로 적극 활용한다.
ODA와 시민사회 관점에서 본 연구의 함의는 더욱 실천적이다. 인도네시아는 민주화 이후 공여국들의 거버넌스 개혁 지원과 시민사회 강화 프로그램의 주요 대상국이 되었으며, USAID·ADB·한국 KOICA 등 주요 공여 기관이 지방분권화, 반부패, 선거 역량 강화 분야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본 논문이 제기하는 구조주의적 시각은, 외부 지원을 통한 민주주의 공고화 전략이 인도네시아의 내생적 계급·종교·지역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을 경우 제한적 효과에 그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취약성은 종종 올리가르키의 정치 포획, 이슬람 정체성 정치의 부상, 그리고 군부의 여전한 영향력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단순히 제도적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무어가 지적한 계급 세력 간 역관계의 미해결에서 비롯된 구조적 산물이다. ODA 설계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통찰을 바탕으로,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 강화 이상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완화와 시민사회의 계급적 독립성 확보를 동시에 겨냥하는 통합적 지원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와 실무자 모두에게 본 논문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미래 지향적 시사점은, 비교정치경제학의 고전 이론들이 동남아시아 맥락에서 갖는 해석적 가능성과 한계를 체계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어의 틀은 장기 구조적 조건에 대한 설명력은 높으나, 종교·민족·젠더 변수나 외부 지정학적 압력 같은 비계급적 요인에 대해서는 분석적 공백을 드러낸다. 인도네시아 사례는 이슬람 민주주의의 내발적 역량, 지방선거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험, 그리고 디지털 시민사회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경험 자료를 제공하며, 이는 향후 비교 연구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한국의 민주화 경험과 ODA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이 연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1987년 민주화 역시 수출 지향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노동·중산층 연합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한인도네시아 개발협력 관계는 단순한 공여-수원의 위계가 아닌 민주주의 발전 경험의 수평적 공유라는 프레임 속에서 재설계될 수 있다. 구조적 결정론과 행위자 중심 이론의 창조적 결합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의 정치체제 변동을 더욱 정밀하게 이해하는 학술적 과제는 여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본 논문은 그 탐구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