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 게시일: 2026-08-02
분류: 정권·선거 변동 | 키워드: democracy, indonesia
📄 영문 전문 보기 (iocss.org) | 원문 출처 바로가기
바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의 고전적 비교역사사회학 이론과 인도네시아 정치 발전 경로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 논문은, 민주주의와 독재의 기원에 관한 구조적 설명이 동남아시아의 특수한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어떠한 적용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내는지를 정면으로 다룬다. 1966년 발표된 무어의 기념비적 저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부르주아 민주혁명(영국, 프랑스, 미국), 보수적 근대화를 통한 파시즘(독일, 일본), 농민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중국, 러시아)라는 세 가지 역사적 경로를 제시함으로써, 계급 구조와 농업 관계가 정치 체제의 유형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확립한 바 있다. 그러나 무어의 분석 틀은 주로 유럽과 동아시아의 대국들을 대상으로 구성된 것이었기에,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업, 복합적 민족·종교 구조, 그리고 군부의 압도적 역할이라는 고유한 조건을 지닌 인도네시아의 사례에 이 틀을 적용하는 작업은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중요한 도전이자 기여가 된다. 202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가 프라보워 수비안토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적 후퇴의 징후를 드러내는 현 시점에서, 이 논문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구조적 조건을 재검토하는 시의성 높은 학술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논문의 핵심 기여는 무어의 계급 중심 분석 틀을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국면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면서, 그 설명력과 이론적 간극을 동시에 규명하는 데 있다.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 1957~1965)'와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 1965~1998)' 권위주의 체제, 그리고 1998년 레포르마시(Reformasi) 이후의 민주화 이행이라는 극적인 정치 변환 과정을 무어의 렌즈로 해석할 때,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도네시아 부르주아지의 취약성과 군부·관료의 지배적 역할이다. 무어는 강력한 독립적 부르주아지를 민주주의 이행의 핵심 추동력으로 보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상업 자본은 화교 기업인(페라나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정치적으로 주변화되었고, 지주 계급은 네덜란드 식민통치하의 강제경작제도(cultuurstelsel)를 거치며 자율적 계급 행위자로 성장하기보다는 식민 국가에 종속된 채 분절화되었다. 이러한 계급 구조의 특수성은 무어의 세 가지 경로 중 어느 하나에도 인도네시아를 깔끔하게 배치하기 어렵게 만들며, 논문은 이를 이론의 결함이 아닌 비교역사사회학적 분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로 재해석한다.
인도네시아 사례는 ODA 실천 및 시민사회 개발이라는 광범위한 흐름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수하르토 체제 붕괴 이후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나다툴 울라마(NU), 무함마디야 등 이슬람 시민사회 조직들은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 민주적 규범의 담지자이자 사회적 자본의 핵심 기반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무어가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종교 결사체와 시민사회 조직의 정치적 역할을 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시에, 레포르마시 이후 인도네시아에 유입된 대규모 ODA와 민주주의 지원 프로그램들은 기대만큼의 민주적 공고화를 이끌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리가르히 구조가 민주적 선거제도와 결합하여 형성한 이른바 '올리가르키 민주주의(oligarchic democracy)'는 무어의 계급 경로론이 예측하지 못한 하이브리드 정치 형태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실질적 엘리트 지배의 공존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개발협력 기관들이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를 성공 사례로 규정하면서도 그 공고화의 취약성을 간과해온 경향은, 이 논문의 구조적 분석이 제공하는 비판적 통찰과 정면으로 대화해야 할 지점이다.
정책적 함의의 측면에서, 이 연구는 민주주의 촉진(democracy promotion) 프로그램의 설계와 평가에 있어 계급 구조 및 역사적 경로 의존성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무어의 프레임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재독해하면, 1998년 이후의 이행이 부르주아 혁명이나 대중 봉기의 결과라기보다는 수하르토 체제 내부 엘리트 균열과 경제위기라는 구조적 충격에 의한 '위로부터의 이행(transition from above)'에 가까웠음이 드러난다. 이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단순한 선거 제도의 정비나 반부패 법령의 강화가 아니라, 토지 개혁, 노동권 강화, 화교 자본과 국내 자본 간 불평등 구조의 해소 등 계급 관계의 근본적 재편임을 함의한다. ODA 공여국과 국제기구들이 인도네시아에 대한 거버넌스 지원 전략을 수립할 때, 이처럼 역사적 경로 의존성을 고려한 계급 구조 분석을 참조 틀로 채택하는 것은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긴요한 과제다.
미래 연구 및 실무자들을 위한 시사점으로는 세 가지를 강조할 수 있다. 첫째, 비교역사사회학과 현대 정치경제학의 융합을 통해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변환을 설명하는 새로운 중범위 이론(middle-range theory)의 개발이 요청된다. 무어의 고전적 틀은 여전히 유효한 분석적 자원이지만, 식민지 유산, 이슬람 정치, 군부 제도화, 분권화 개혁이라는 인도네시아 특유의 변수들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이론적 확장이 필요하다. 둘째,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현재적 위기—사법부 독립성 훼손, 군부의 민정 복귀, 비판적 미디어에 대한 압력—를 구조적 계급 동학의 산물로 파악하는 시각은, 단기적 정치 사건 분석을 넘어 장기적 제도 변화를 예측하는 연구 의제로서 큰 잠재력을 가진다. 셋째, IOCSS와 같은 연구기관 및 ODA 실무자들은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 지원이 단순히 선거 기술 지원이나 반부패 캠페인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계급 관계와 국가-시민사회 역학에 뿌리를 둔 구조적 개입으로 이어져야 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바링턴 무어가 수십 년 전에 제기한 질문—"누가, 어떤 조건에서, 민주주의를 만드는가?"—은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신흥 민주주의 국가들에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