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 게시일: 2026-08-14
분류: 정권·선거 변동 | 키워드: democracy,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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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20세기 후반의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체제 전환을 경험한 국가 중 하나로, 권위주의적 독재의 공고화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 경로를 모두 걸어온 사례이다. 『Journal of Contemporary Asia』에 게재된 이 연구는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의 고전적 비교역사사회학 틀을 인도네시아에 적용함으로써, 계급 구조와 국가 형성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특정 정치체제의 등장을 조건 짓는지를 재검토한다. 무어의 1966년 저작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봉건 지주, 상업 부르주아지, 농민이라는 세 계급의 연합 양태에 따라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상이한 근대화 경로가 결정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논문은 그 고전 명제를 동남아시아 최대 국가의 역사적 경험과 대조하며, 무어의 이론이 비서구 사회에 적용될 때 어떤 설명력을 갖고 어떤 한계에 직면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이 같은 비교역사적 접근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민주주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 현상을 이해하려는 연구자와 정책 실무자 모두에게 중요한 이론적 출발점을 제공한다.
무어의 분석 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부르주아지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ie, no democracy)"는 명제로, 이는 상업자본에 기반한 중산 계급이 봉건적 지주 계급의 권력에 도전함으로써만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경우, 네덜란드 식민 통치 하에서 형성된 계급 구조는 이 도식을 간단히 따르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플랜테이션 경제와 관료적 국가 장치는 자율적인 상업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억제하였으며, 독립 이후 수카르노(Sukarno)의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와 수하르토(Suharto)의 신질서(New Order, 1966~1998) 체제는 군부-관료-기업 엘리트의 삼각 동맹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논문은 수하르토 체제의 권위주의적 공고화가 무어가 제시한 '보수적 근대화' 경로—즉 지주 계급과 국가가 결탁하여 농민을 배제하는 방식의 위로부터의 혁명—와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인도네시아 특유의 군사적 이중기능(dwifungsi) 이데올로기와 이슬람 대중조직의 역할이 무어의 유럽·북미 중심 분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독자적 변수임을 논증한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뒤이은 레포르마시(Reformasi) 운동으로 촉발된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무어의 이론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면에서 비정형적(atypical)이다. 무어의 도식에서는 민주화가 자율적 부르주아지의 계급 투쟁을 통해 달성된다고 보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 도시 중간층과 학생 운동, 그리고 이슬람 시민사회 조직이 체제 전환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제 개발협력(ODA) 행위자들과 초국적 시민사회 네트워크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세계은행, IMF, 양자 공여국들은 구조조정 프로그램 및 거버넌스 개혁 조건을 통해 민주적 제도의 형식적 도입을 촉진하였으나, 그 과정이 실질적인 계급 권력 재편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 논문이 제기하는 이론적 쟁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개발협력 연구와 맞닿는다: 외부 행위자에 의해 이식된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무어가 강조한 계급 구조적 기반 없이도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
정책적 함의의 측면에서, 이 논문은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현재적 취약성을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데 중요한 준거를 제공한다. 2014년 이후 조코위(Joko Widodo) 정부와 2024년 취임한 프라보워(Prabowo Subianto) 정부 하에서 관찰되는 민주주의의 점진적 침식—사법부 독립성 약화, 언론 자유 제한, 시민사회에 대한 압박 강화—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급 연합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무어의 틀로 보면, 과두적 엘리트 집단이 민주적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 권력 배분을 독점하는 '선택적 민주주의(selective democracy)' 또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ODA 및 민주주의 지원(democracy assistance) 프로그램의 설계에도 직결되는 함의를 갖는다. 제도적 역량 강화나 선거 지원에 치우친 기존의 민주주의 지원 패러다임이, 계급 불평등과 과두적 경제 권력이라는 구조적 변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다.
연구자와 실무자를 위한 미래 지향적 시사점은 크게 세 방향으로 수렴된다. 첫째, 비교역사사회학의 고전 이론을 아시아 및 비서구 맥락에 창의적으로 재적용하는 연구 전통을 이어가되, 그 이론이 생산된 역사적·지리적 맥락을 함께 성찰하는 반성적 비교주의(reflexive comparativism)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사례는 무어의 이론이 보편적 설명 틀이 아니라 수정·확장되어야 할 출발점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둘째, 개발협력 실무에서는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계급 불평등 완화와 포용적 경제 성장을 보다 명시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형식적 제도 이식 중심의 접근에서 사회경제적 구조 변환을 지향하는 접근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인도네시아의 경험은 동남아시아 전체는 물론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체제 이행 사례를 연구하는 데에도 소중한 비교 준거가 된다. IOCSS와 같은 연구 기관이 이론적 엄밀성과 현장 지식을 결합하여 이러한 비교연구를 선도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것이, 급변하는 국제 정치경제 질서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