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 게시일: 2026-08-20
분류: 정권·선거 변동 | 키워드: democracy,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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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가 1966년 발표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은 비교역사사회학의 고전으로, 국가가 민주주의·파시즘·공산주의 중 어느 경로로 진입하는지를 농업 계급구조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역할이라는 두 축으로 설명한다. 이 이론틀을 인도네시아에 적용한 본 연구는 단순한 사례 검증을 넘어, 동남아시아 최대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구조적 조건 위에서 권위주의를 경험하고, 또 어떠한 계급 연합의 재편을 거쳐 민주적 이행을 달성했는지를 재구성함으로써 비교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지평을 확장한다. 특히 2024년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 정부 출범 이후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질적 후퇴 가능성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이 연구는 인도네시아 정치 변동의 구조적 뿌리를 역사적 깊이로 되짚는 시의적절한 작업이다.
무어의 핵심 명제는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라는 명구로 요약된다. 그는 지주 계급이 부르주아지를 억압하거나 상업 농업을 기반으로 국가와 밀착할 때 권위주의적 근대화가 나타나며, 반대로 독립적인 상업 계급이 성장하여 왕권 또는 귀족 권력에 제도적으로 도전할 수 있을 때 의회 민주주의가 등장한다고 보았다. 인도네시아의 맥락에서 이를 적용하면, 네덜란드 식민지배가 남긴 플랜테이션 중심 농업경제와 토착 자본의 취약성이 수카르노(Sukarno)의 지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와 수하르토(Suharto)의 신질서(New Order) 권위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던 구조적 토대였음을 논문은 강조한다. 1965~66년의 PKI(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과 군부 쿠데타는 단순한 냉전적 사건이 아니라,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계급 갈등이 폭력적으로 해소된 과정으로 무어의 시각에서 재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농민 계급이 봉기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무어적 '실패 경로'와 일맥상통한다. 반면 1998년 레포르마시(Reformasi)는 수하르토 개발독재 하에서 형성된 도시 중간계급과 학생운동, 그리고 분화된 이슬람 시민사회 세력이 연합하여 권위주의적 계급 동맹을 붕괴시킨 과정으로 해석되며, 이는 무어가 서유럽에서 발견한 부르주아 민주화 동학의 아시아적 변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연구가 ODA 및 시민사회 연구와 교차하는 지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8년 민주 이행 이후 인도네시아는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각국 양자 원조기관의 거버넌스 지원 프로그램이 집중된 핵심 수원국이자 이후 원조 수여국(donor)으로 성장한 복합적 위상을 지닌 국가다. 이 과정에서 개발원조는 선거제도 정비, 지방분권화, 반부패 기구 설립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절차적 공고화를 지원했지만, 무어의 분석틀은 이러한 제도주의적 접근이 놓치는 계급적 토대 문제를 상기시킨다. 즉 선거와 의회는 정착되었지만, 과두적 경제 엘리트와 군부 네트워크가 정당 체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경로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동남아시아 지역 정치경제의 맥락에서 보면, 필리핀의 마르코스 2세 복귀, 태국의 반복적 군사개입, 미얀마의 2021년 쿠데타 이후 역내 민주주의 후퇴 흐름은 인도네시아 사례를 고립된 분석 대상이 아니라 비교 지역 연구의 중심 사례로 위치시킨다. 인도네시아가 역내 민주주의의 '닻(anchor)'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결국 구조적 계급 연합이 어떻게 재편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 논문의 함의다.
정책적 관점에서 이 연구는 국제개발 공동체에 대해 중요한 경고를 발신한다. 통상적인 민주주의 지원 프로그램은 헌정 설계, 선거 관리, 시민사회 역량 강화를 중심으로 설계되지만, 무어적 시각은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이 결국 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계급 관계의 변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민족주의와 디지털 경제 성장이 새로운 계급 분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신흥 디지털 중간계급이 정치적 주체성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플랫폼 경제 하의 노동 계급이 어떻게 조직화하는지가 민주적 공고화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프라보워 정부가 수하르토식 민족주의 담론과 경제 개입주의를 결합하는 방식은, 시민사회에 대한 공간 축소(shrinking space) 경향과 함께 무어가 경고한 '위로부터의 근대화' 경로의 재현 가능성을 시사한다. ODA 공여국과 국제기구는 제도 수준의 지원을 넘어 토지·노동·자본에 걸친 구조적 불평등 의제를 개발협력 프로그램에 통합해야 한다는 정책적 시사점이 여기에서 도출된다.
미래 연구 및 실무자를 위한 시사점으로는 세 가지를 제안할 수 있다. 첫째, 비교역사사회학적 방법론의 동남아시아 적용 연구를 심화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사례는 무어의 이론이 비유럽 맥락에서 수정·보완될 여지와 함께 여전히 강력한 설명력을 지님을 보여주며, 향후 베트남·캄보디아·미얀마 등 체제 전환 과정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계급구조 분석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둘째, IOCSS를 포함한 연구기관들은 단순한 민주주의 지수 추적을 넘어 계급 연합 구성의 변화를 추적하는 장기 종단 연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셋째, 개발협력 실무자들은 시민사회 조직 지원 시 단순한 역량 강화를 넘어 해당 조직이 어떤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며 어떤 정치적 연합 가능성을 갖는지를 분석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바링턴 무어의 반세기 전 통찰이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이 연구는, 민주주의란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역관계의 산물이라는 불편하지만 본질적인 진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